히토바시라의 잔혹한 유래와 영화 '신명'이 이태원 참사를 주술적 시각으로 해석하며 던진 사회적 파장, 그리고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해 봅니다.
2022년 10월 29일, 서울의 심장부 이태원에서 벌어진 비극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아 있습니다. 159명의 젊은 생명이 스러져간 그날의 기억은 단순한 사고를 넘어 한국 사회의 안전 시스템과 책임 소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신명(神明, The Pact)'은 이 비극을 단순한 관리 소홀이 아닌 일본의 전근대적 인신공양 풍습인 '히토바시라(人柱)'와 연결 짓는 파격적인 설정을 선보이는 특이한 주제로 등장했습니다. 오컬트와 정치 스릴러를 결합한 이 작품이 왜 히토바시라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히토바시라(人柱)의 잔혹한 역사와 주술적 배경
'히토바시라'는 직역하면 '사람 기둥'이라는 뜻으로, 과거 일본에서 거대한 건축물을 세울 때 신의 노여움을 달래거나 구조물의 영구적인 안정을 기원하며 살아있는 사람을 기초 아래나 벽 속에 매장하던 인신공양 관습을 말합니다. 주로 강물이 거세 다리가 자꾸 무너지는 곳이나, 난공불락의 성을 쌓아야 할 때 행해졌다고 전해집니다. 마츠에 성(松江城)이나 니혼바시 다리 건설 당시의 설화들은 현대인에게도 소름 끼치는 공포를 선사하곤 합니다.
이러한 행위의 밑바닥에는 '거대한 목적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지극히 비인도적인 전체주의적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개인의 생명을 구조물을 지탱하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이 주술적 행위는, 현대 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야만성의 상징이라 본다. 하지만 영화 '신명'은 이 고대적 악습의 그림자가 21세기 대한민국 한복판에 드리워져 있다는 도발적인 가설을 세웁니다. 권력을 유지하고 국가의 명운을 조작하려는 세력이 현대판 히토바시라를 통해 주술적인 판을 짰다는 설정은 관객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과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풍습이 단순히 과거의 유물로 남지 않고, 현대 정치나 사회적 참사를 해석하는 메타포로 사용된다는 점 자체가 우리 사회의 불신이 얼마나 깊은지를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영화적 상상력이라 해도,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개념이 현대적인 참사와 엮이는 순간, 그 비극은 더욱 고통스럽게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신명'과 이태원 참사: 주술이 된 비극의 재해석
2025년 6월 개봉한 영화 '신명'은 제작 단계부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신명'을 거꾸로 하면 영부인의 개명 전 이름인 '명신'이 된다는 점부터가 노골적인 풍자를 암시합니다. 김규리, 안내상 주연의 이 영화는 이태원 참사로 딸을 잃은 한 기자가 권력의 핵심부에 숨겨진 기이한 주술적 실체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립니다. 특히 영화 속에서 참사가 벌어진 골목에 설치된 분홍색 가벽이나, 영정 사진 없는 분향소 등의 연출은 실제 이태원 참사 당시 제기되었던 의혹들을 오컬트적 요소로 치환하여 보여줍니다.
작중에서 일본인 음양사 '황가'가 등장하여 특정 지역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장면은 히토바시라의 현대적 변용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영화는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지닌 지정학적 특성과 특정 세력의 주술적 맹신이 결합하여 159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암시를 던집니다. 이는 단순한 음모론을 넘어,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한 '부재의 시간'을 주술이라는 강력한 서사로 채워 넣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물론 일각에서는 실제 참사 유가족들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비판도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참사의 본질은 주술이 아니라 정부의 실정과 안전 불감증에 있는데, 이를 귀신의 소행이나 비현실적인 의식으로 치부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지적입니다. 저 또한 영화를 보며 예술적 자유와 윤리적 책임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굳이 히토바시라라는 단어를 소환한 이유는, 국가 권력이 국민을 인간이 아닌 '기둥(제물)'으로 보았다는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사의 기억과 진실: 우리가 주술적 해석에 주목하는 이유
왜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도 사회적 대참사 앞에서 이러한 주술적 해석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합리적인 설명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극의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찰 인력이 충분히 배치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이유, 구조 골든타임이 지켜지지 않았던 정황 등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공백들이 존재할 때, 대중은 그 공백을 메울 '보이지 않는 손'을 찾게 마련입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159명의 생명이 한순간에 사라진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 주지 못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히토바시라 같은 극단적인 비유는 오히려 권력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되기도 합니다. 영화 '신명'이 오컬트라는 장르를 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이 작품에 열광하거나 혹은 격하게 분노하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책임지지 않는 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개인적인 경험을 되돌아보면, 당시 참사 현장에서 구조를 도왔던 이들의 증언 중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는 표현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이 '인간의 벽'이 고대 일본의 '인간 기둥(히토바시라)'과 겹쳐 보이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술적 상상력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 상상력이 왜 등장해야만 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진실이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는 한, 사회적 참사는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 주술적 제물로 해석될 여지를 남겨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신명'이 히토바시라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명확해 보입니다. 권력이 국민의 생명을 도구화하는 순간, 그 사회는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시대로 회귀한다는 경고입니다. 이태원 참사의 159명은 누군가의 주술적 목적을 위한 제물이 아니라, 각자의 꿈과 미래가 있었던 고귀한 생명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히토바시라의 뜻을 되새기며 분노하는 이유는, 다시는 이 땅에서 누군가의 안정이나 권력을 위해 무고한 희생이 강요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적 풍자가 현실의 비극을 다소 자극적으로 다루었을지라도, 그 기저에 깔린 '생명 존중'의 메시지만큼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가장 강력한 주술은 비극을 잊지 않고 진실을 요구하는 우리들의 연대와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 말로는 설명이 안되는 휘한한 작자들이 잠시동안 온 나라를 유린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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