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양대 산맥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단순히 종교적 차이를 넘어 1,400년의 역사와 정치, 권력 투쟁이 얽힌 복잡한 문제입니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의 후계 구도부터 현대 중동의 패권 다툼까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이들의 분쟁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중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을 파악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과정입니다. 같은 알라를 믿고 같은 성전인 꾸란을 따르면서도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평행선을 달려온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종교적 교리의 차이를 넘어선 인류사의 거대한 비극이자 정치적 산물입니다. 이들의 갈등은 7세기 예언자 무함마드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정치적 패권 다툼과 집단적 정체성 형성 과정을 거쳤고, 오늘날에는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대립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속에 담긴 인간사의 권력욕과 역사적 상처가 너무나 깊고 선명합니다. 중동의 복잡한 실타래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되는 7세기의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근본적인 동기를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의 후계자 지명과 공동체의 분열
이슬람 공동체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사건은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발생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이슬람 제국을 이끌 명확한 후계자를 문서나 공식적인 석상에서 명시하지 않았고, 그가 떠난 직후 공동체는 지도자의 부재라는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대다수의 무슬림은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의 합의를 통해 가장 덕망 있고 정치적 능력을 갖춘 인물을 지도자로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함마드의 절친한 동료이자 초기 신봉자였던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언자의 언행과 관습인 '수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수니파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수니파의 논리는 지도자의 자격이 반드시 혈통에 국한될 필요는 없으며, 공동체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누구나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했습니다.
반면 소수의 사람들은 예언자의 신성한 혈통만이 공동체의 정통성을 계승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유일한 정당한 후계자로 지지했던 이들은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시아 투 알리, 즉 시아파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시아파는 알리가 예언자로부터 직접 후계자로 지명받았다는 신학적 믿음을 가졌으며, 아부 바크르를 포함한 초기 칼리프들이 알리의 정당한 자리를 찬탈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부 바크르 이후 우마르와 오스만이 칼리프 자리에 오르는 동안 알리의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소외감을 느끼며 주류 세력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습니다. 마침내 알리가 네 번째 칼리프가 되었을 때도 갈등은 멈추지 않았으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의 치열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결국 알리가 암살당하면서 이슬람 공동체의 통합은 산산조각이 났고, 이는 종교적 차이를 넘어선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분열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카르발라의 비극과 시아파 순교 정신의 확립
알리의 암살 이후 권력은 수니파 계열의 우마이야 왕조로 넘어갔지만, 시아파의 저항 의지는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분열의 역사를 종교적 정체성으로 완전히 굳힌 사건은 680년 이라크의 카르발라 평원에서 벌어졌습니다. 알리의 차남이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인 후세인 이븐 알리는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강압적이고 세습적인 통치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후세인은 예언자의 혈통으로서 정의를 바로 세우고 이슬람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그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소수의 추종자들은 압도적인 수의 우마이야 왕조 군대에 둘러싸여 처참하게 학살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자, 시아파가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카르발라의 비극'은 시아파에게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종교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시아파는 후세인의 죽음을 불의에 맞선 숭고한 순교로 승화시켰으며, 이때부터 시아파 교리는 순교, 희생, 그리고 억압받는 소수자로서의 저항 의식을 강하게 띠게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시아파 무슬림들은 매년 아슈라 의식을 통해 후세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슬퍼하고, 불의한 권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신앙을 되새깁니다. 반면 수니파는 이슬람 제국의 팽창과 안정을 우선시하며 이슬람법(샤리아)에 따른 사회적 질서 확립에 중점을 두는 다수파의 길을 걸었습니다. 수니파는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칼리프의 통치를 수용하고 제국의 번영을 꾀했으나,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은 완벽한 영적 지도자인 '이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히 다졌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의 차이는 두 종파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거대한 심리적, 문화적 장벽을 쌓아 올렸습니다.

현대 중동의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 종파 갈등의 심화
오랜 세월 종교적, 역사적 차원으로 잠재되어 있던 갈등은 20세기 들어 주권 국가 간의 치열한 패권 다툼으로 그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은 현대 중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시아파의 맹주를 자처하는 이란에 강력한 신정 일치 체제가 들어서고 혁명의 수출을 주장하자,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의 이슬람 세계 내 영향력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때부터 두 국가는 종교적 명분을 내세워 중동 전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냉전에 돌입했습니다. 이들의 갈등은 자국의 영토 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라크, 시리아, 예멘, 레바논 등 주변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현대 중동의 수많은 내전과 분쟁은 사실상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두 거대 국가의 대리전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에서 시아파 계열의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이란과 이에 반대하는 수니파 반군을 지원하는 사우디의 대립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예멘에서도 시아파 반군과 수니파 정부군 사이의 전쟁이 수년째 이어지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낳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긴장은 표면적으로는 1,400년 전의 종파 갈등을 계승하는 듯 보이지만, 그 본질은 에너지 자원 확보, 해상로 장악, 그리고 지역 내 안보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철저한 국가 이기주의와 정치적 계산에 근거합니다. 국제 사회 역시 이러한 종파적 구도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 하면서 갈등은 더욱 복잡하게 꼬여만 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쟁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국제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7세기의 후계자 선정 문제에서 시작된 작은 균열이 카르발라의 비극을 거쳐 거대한 신학적 차이를 만들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국가 간의 생존을 건 권력 투쟁으로 변모했습니다. 이는 수억 명의 삶과 직결된 강력한 정체성의 원천이며, 중동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대목입니다. 중동의 진정한 평화는 두 종파가 서로의 아픈 역사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종교적 명분을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화된 현대 사회에서 중동의 긴장은 에너지 안보와 직결되는 만큼, 이들의 복잡한 역사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노력은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우리 모두의 숙제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