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월 25일,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문화대혁명 4인방 재판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주도했던 장칭과 그 일당에 대한 심판,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함의와 중국의 변화를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역사에는 한 시대의 문을 닫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상징적인 날들이 존재합니다. 중국 현대사에서 1981년 1월 25일은 바로 그런 날이었습니다. 베이징 정이루(正義路) 1번지,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는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었습니다. 피고석에는 한때 중국 대륙을 호령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네 명의 인물이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바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青)을 필두로 한 '4인방(四人幫)'이었습니다.
10년 넘게 중국을 혼란과 파괴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1966~1976)의 주동자들에 대한 이날의 판결은 단순한 사법 절차를 넘어섰습니다. 그것은 마오쩌둥 시대와의 결별을 고하는 의식이자, 덩샤오핑이 이끄는 실용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거대한 신호탄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중국 역사의 변곡점이 되었던 그날의 재판과 판결이 갖는 역사적 무게를 재조명해 봅니다.

문화대혁명의 배후 홍위병 그리고 4인방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마오쩌둥의 주도로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극좌 사회주의 대중 운동입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마오쩌둥이 "자본주의 사상을 타파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재장악하기 위해 기획한 정치 투쟁이었습니다.


마오의 선동에 호응한 학생 조직인 '홍위병'들은 '파사구(낡은 사상·문화·풍속·습관 타파)'를 외치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지식인과 관료, 예술가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숙청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의 교육과 행정은 마비되었고 경제는 파탄 났으며, 사회적 신뢰는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이 광기의 시대는 1976년 9월 마오쩌둥의 사망과, 문혁을 주도했던 '4인방'이 체포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복권된 덩샤오핑은 문혁을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로 규정하고, 이념 투쟁 대신 개혁개방이라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하게 됩니다.
재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주도했던 시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1966년부터 시작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거대한 광기였습니다. 마오쩌둥의 친위 세력이었던 4인방(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은 이 시기의 실질적인 지휘부였습니다. 그들은 "낡은 것을 타파한다"며 수천 년 된 문화유산을 파괴했고, 지식인과 고위 관료들을 '주자파(자본주의 추종 세력)'로 몰아 무자비하게 숙청했습니다. 특히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이었던 장칭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녀는 문화 예술계를 장악하고 혁명 모범극만을 강요하며 인민들의 눈과 귀를 가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의 경제는 파탄 났고 교육은 멈췄으며 사회적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될 때까지 사회주의 중국은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암흑기였습니다. 1981년의 재판은 억눌려왔던 10년의 분노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분출된 자리였습니다.

1981년 1월 25일, 역사의 심판이 내려지다
약 두 달간의 심리를 거쳐 운명의 1월 25일 특별재판부는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법정의 공기는 무거웠으나 장칭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재판 도중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물었을 뿐이다"라며 모든 책임을 마오쩌둥에게 돌리면서도 자신은 그의 충실한 집행자였음을 강조하는 표독스러움을 보였습니다. 이는 자신을 처벌하는 것은 곧 마오쩌둥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항변이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단호했습니다. 판결 내용은 전 세계로 타전되었습니다.
- 장칭(江青), 장춘차오(張春橋): 사형 및 집행유예 2년, 정치적 권리 영구 박탈
- 왕훙원(王洪文): 무기징역
- 야오원위안(姚文元): 징역 20년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형 집행유예 2년'이라는 독특한 형벌입니다. 이는 사형을 선고하되 2년 동안의 수형 태도를 지켜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줄 여지를 남기는 중국 특유의 제도입니다. 실제로 장칭은 2년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이는 4인방을 처단하되 마오쩌둥의 아내를 직접 처형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부담과 마오 추종 세력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덩샤오핑의 고도의 정치적 셈법이 깔린 결과였습니다.


판결 그 후, 이념에서 실용으로
1월 25일의 판결은 중국이 '계급 투쟁'의 시대에서 '경제 건설'의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4인방의 몰락은 곧 극좌 이념 세력의 퇴장을 의미했고 이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했습니다. 인민들의 관심은 더 이상 사상 검증이나 정치 집회가 아닌,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흑묘백묘론)"는 실용주의적 가치로 옮겨갔습니다.
이 재판 이후 중국 공산당은 '역사적 결의'를 통해 문화대혁명을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온 내란"으로 공식 규정했습니다. 만약 이날의 단죄가 없었다면, 오늘날 G2로 성장한 중국의 경제 발전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법정에서 장칭은 끌려나가면서도 "혁명 무죄, 조반 유리(혁명은 죄가 없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를 외쳤지만, 역사는 그녀의 외침이 아닌 법원의 판결을 선택했습니다. 1991년, 장칭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1981년 1월 25일 내려진 4인방에 대한 판결은 권력의 무상함과 역사의 엄중함을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며, 그 끝은 결국 파멸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한 국가가 과거의 과오를 어떻게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중국의 모습은 43년 전 오늘, 그 법정에서 시작된 변화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만 교훈을 줍니다. 1월 25일, 그날의 판결을 되새기며 정의와 시대정신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파렴치한 내란을 획책하고도 반성이 전혀 없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자와 그의 수하들을 보면 엄중한 단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