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영화 뉘른베르크와 네타냐후 이스라엘의 만행, 반복되는 역사와 심판 받지 않는 악의 연대기

Equinoxe 2026. 4.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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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뉘른베르크'를 통해 본 전범 재판의 역사적 가치와 2026년 현재 가자지구 및 이란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비교합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현대판 히틀러로 규정하며 국제법적 처벌의 당위성을 짚어 봅니다.

영화 '뉘른베르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범죄를 법의 심판대에 올린 기록입니다. 80여 년의 세월이 흐른 2026년 오늘, 우리는 가자지구를 넘어 이란의 민간인 시설까지 서슴지 않고 포격하는 이스라엘의 행보에서 나치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주도하는 현재의 군사 작전은 단순한 자위권을 넘어선 명백한 전쟁 범죄의 범주에 들어선 명백한 범죄 행위입니다. 역사의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피해자였던 이들의 후손이 이제는 가해자의 자리에 서서 국제법을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가 제시한 정의의 기준을 바탕으로, 현대판 전범 수장으로서 네타냐후에 대한 처벌이 왜 필연적인지 그 당위성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영화 뉘른베르크
영화 뉘른베르크

역사의 거울에 비친 정의와 영화 뉘른베르크가 던지는 준엄한 경고

영화 '뉘른베르크'는 단순히 나치 전범들을 심판하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물을 넘어,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조직적 학살이 어떻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의 심판을 받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로버트 잭슨 검사는 "침략 전쟁은 국제적 범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모든 악의 집합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문장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과 교차하며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거 유대인을 학살했던 나치의 논리가 오늘날 이스라엘에 의해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모하는 이 비극적인 순환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라 봅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보여주는 군사적 행보는 자위권을 넘어선 명백한 인종청소의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나치 피고인들이 "나는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라고 항변하던 모습은, 현재 이스라엘군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테러리스트 소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피해"라는 변명과 궤를 같이합니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재판이 확립한 원칙은 명확합니다. 반인도적 범죄에 있어서 개인의 책임은 국가의 명령 뒤에 숨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 가자지구의 민간인 사망자 비율이 전체 희생자의 75%를 상회하고, 주거 시설의 60% 이상이 파괴된 수치는 단순한 전쟁의 산물이 아닌 체계적인 파괴의 결과물로 보입니다. 이는 80년 전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현대적인 미사일 공격으로 치환한 것에 불과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공격 양상이 최근 가자지구를 넘어 이란 본토의 민간인 거주지까지 무차별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우려스러운 대목입니다. 2026년 들어 발생한 이란 미납(Minab) 시의 샤자레 타예베 학교 공습은 군사적 목표가 아닌 민간인, 특히 어린 생명을 목표로 한 테러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합니다. 영화 속에서 괴링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애쓰던 것처럼, 네타냐후 역시 이란의 위협을 과장하여 민간인 살상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고한 어린아이들이 학교 현장에서 미사일에 희생되는 것은 어떠한 군사적 명분으로도 씻을 수 없는 전범 행위입니다. 이러한 잔혹함은 나치가 점령지에서 저질렀던 만행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뉘른베르크 재판
재판의 전범들

네타냐후와 히틀러의 평행이론, 권력 유지를 위한 학살의 정당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행보는 20세기 전범들의 독재적 성향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Lebensraum)을 내세워 타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것처럼, 네타냐후 역시 이스라엘의 안보라는 명분을 극단화하여 팔레스타인과 주변국 이란의 존재 자체를 무력화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특히 본인의 정치적 위기, 즉 부패 혐의와 사법부 무력화 시도에 따른 국내적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전쟁을 도구로 활용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전범 수장의 행태와 무섭게 일치합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본인의 권력이 공고해진다는 계산 하에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행위는 도덕적 파산을 넘어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전범 네타냐후
전범 네타냐후

최근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네타냐후에 대해 체포영장을 청구한 것은 인류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판단합니다. 가자지구 내 식량과 식수 공급을 차단하여 굶주림을 전쟁의 무기로 사용하는 행위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나치의 고사 작전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습니다. 2024년 이후 가자지구의 영아 사망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2026년 현재 이란과의 교전 과정에서 발생한 부수적 민간인 사망 수치는 이미 우발적 사고의 범주를 벗어났습니다. 이는 고의적인 방치와 파괴에 의한 결과라는 점에서 네타냐후를 히틀러 못지않은 전범 수장으로 규정하는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 비극적인 순환 속에서, 국제사회는 다시 한번 뉘른베르크의 원칙을 소환하여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야 할 시점입니다.

네타냐후의 정책은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거센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는 극우 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전쟁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독일 민족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히틀러의 말기와 겹쳐 보입니다. 본인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자국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이웃 나라 민간인을 학살하는 행태는 지도자로서의 자격 상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가진 역사적 상처를 타국에 대한 가해의 근거로 삼는 것은 도덕적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네타냐후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이스라엘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인권 수호를 위한 필수적인 조치입니다.

국제법의 무력함과 현대 사회의 침묵에 대한 비판적 고찰

영화 '뉘른베르크'의 결말은 법의 승리를 말하지만, 현실의 가자지구와 이란 접경지는 국제법의 무력함만을 증명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한 감정이 듭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만행에 대해 '방어권'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주는 행태는 80년 전 전범들을 비호했던 이들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현대 사회의 인권 담론이 특정 국가의 전략적 가치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현상은 매우 위험한 징조라고 봅니다. 가자지구의 학교, 이란의 의료 시설이 폭격받는 상황에서도 침묵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제기구들의 모습은 그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부분은 단순히 먼 나라의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과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악의 평범성'을 주창했던 한나 아렌트의 이론처럼, 우리는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학살의 수치에 무뎌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자성해야 합니다. 네타냐후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한 정치인을 심판하는 것을 넘어, "어떤 명분으로도 민간인 학살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재확립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2026년 3월까지 집계된 이란 민간인 희생자 수와 가자지구의 폐허가 된 모습은 우리에게 행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네타냐후가 합당한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권좌에서 내려온다면, 이는 전 세계 독재자들에게 "강자의 논리라면 학살도 용인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국제 사회가 '정의'라는 가치를 얼마나 엄중하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법적 절차였음에도 불구하고 시행된 이유는 다시는 인류가 같은 비극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비극의 가장 큰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스스로가 비극의 창조자가 되었습니다. 이란의 학교와 병원을 타격하면서 "정밀 분석"을 운운하는 그들의 오만함은 뉘른베르크 법정의 피고인들이 보였던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는 전 세계가 힘을 합쳐 네타냐후를 국제법정에 세워야 합니다. 그것만이 억울하게 죽어간 가자와 이란의 민간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뉘른베르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정의는 저절로 찾아오지 않으며, 끊임없는 기록과 폭로, 그리고 법적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이 자행하는 가자와 이란의 만행은 이미 레드라인을 넘었으며, 이를 방치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범이 되는 길입니다. 네타냐후를 전범 재판소 피고인석에 세우는 것만이 무너진 국제 질서를 바로잡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그 반복의 고리를 끊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히틀러의 종말이 그러했듯, 권력을 이용해 인류애를 짓밟은 지도자의 끝은 반드시 법의 심판대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뉘른베르크가 2026년의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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